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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생신날이었습니다.
조카가 할아버지께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생신인데 가족들과 함께 밥 한 끼 먹으면 좋겠다 싶어 모시고 나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주차를 하느라 조금 늦게 뒤따라갔고, 아버지는 먼저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계단에서 넘어지셨습니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곧바로 응급실로 모시고 갔습니다. 검사 결과 허리 골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렇게 아버지는 입원하셨습니다.
집에서 모셔보려고 퇴원시켜 드렸습니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셨지만 제 마음은 편하지 않았습니다.
약이 너무 센 것인지 아버지는 계속 비몽사몽 하셨고, 급기야 섬망 증세가 너무 심해지셨습니다.
정신이 맑지 않은 채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시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골절 때문에 병원에 모셨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점점 더 힘들어지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집으로 모셔서 우리가 돌봐드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퇴원시켜 집으로 모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집에서 모셔보니 현실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을 나가야 했고, 제가 없는 동안 엄마 혼자 아버지를 돌보기에는 너무 힘에 부쳤습니다.
마침 동생이 집에 왔을 때 함께 의논했습니다.
“딱 한 달만 집 앞 요양병원에 모시자. 가까우니까 매일 가서 운동도 시켜드리고, 상태가 좋아지시면 다시 집으로 모셔오자.”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오래 모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한 달만 그렇게 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입원 바로 다음 날, 코로나로 면회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고 바로 다음 날부터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금지되었습니다.
집 바로 앞에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매일 찾아가 운동도 시켜드리고 이야기도 나누려고 가까운 곳으로 모셨는데, 바로 앞에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통화뿐이었습니다.
영상통화를 하면 아버지는 화면 속 제 얼굴을 알아보시고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아, 나 좀 데려가라.”
“나 집에 데려가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는데도 코로나 때문에 들어가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괜찮아지시면 집에 가자고 말씀드리는 것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는 신장까지 나빠지셨습니다.
원래 다니시던 대학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으셨고, 퇴원하신 뒤에는 집 근처 보훈요양병원으로 다시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 달 정도 계시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저는 엄마 앞에서는 마음껏 울지 못했습니다.
엄마도 평생을 함께한 남편을 잃었으니까요.
대신 혼자 차를 타고 오갈 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아버지 생각이 나면 울고, 영상통화 속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나 좀 데려가라”라고 하시던 목소리가 떠오르면 또 울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울대가 아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너무 울다 보니 목이 꽉 막히고 가슴에서부터 무언가 치밀어 올라와 목 안쪽까지 아팠습니다.
그리고 참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때 그냥 집에서 조금 더 모셔볼걸.
내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옆에 있어 드릴 걸.
아버지가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 하셨는데 어떻게든 모셔왔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아버지를 보내드린 뒤 저는 요양보호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서 제게는 한 가지 마음이 남았습니다.
엄마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곁에서 모시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부모님을 집에서 모시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족마다 형편이 다르고 보호자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던 우리 가족도 아버지를 외면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을 해야 했고 엄마 혼자 아버지를 돌보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딱 한 달만 모시고 매일 찾아가 운동을 시켜드리는 것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원 바로 다음 날 코로나로 면회가 막힐 것이라고는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나니 그때의 사정을 아무리 되짚어봐도 후회는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회는 제가 엄마를 바라보는 마음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엄마를 돌보면서 노인을 돌본다는 것이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부축해야 하는지, 몸이 불편한 어르신에게는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제대로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쌓여 결국 저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주야간보호센터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요양보호사가 된 이유의 시작에도 아버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센터에서 어르신들을 돌보다 보면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는 어르신을 볼 때도 그렇고, 가족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면 영상통화 속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떠오릅니다.
“나 좀 데려가라.”
그래서인지 그 한마디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도 엄마를 돌보는 일이 늘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일을 해야 하고 몸이 지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제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아직 제가 할 수 있는 동안에는 엄마 곁에 있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아버지께 이제 와서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마음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는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